Ⅰ. 서론
역사 영상물을 바라봄에 있어서 두 가지 시각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바로 역사 콘텐츠인 역사의 대중 문화화라는시각과 역사 대중화라는 시각입니다. 이 두 가지는 평행선을 타지 않으며 전혀 다른 부분입니다.역사영화란 이처럼 사람들을 계몽하면서 각성시키는 역사 대중화 라는 뜻과 역사를 오락적인 것으로 소비하는 대중문화화란 뜻 사이에서 적당한 타협을 이루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역사적인 해석과 사실을 중시하면서 사람들에게 쉬운 방식으로 전달해야하며, 역사영상물을 제대로 바라볼뿐만 아니라 역사를 재미와 의미를 함께 갖추고 있는 소재로 바라보아야 한다는것 입니다.
역사영화에 관하여 우리가 가져야 하는 태도는 바로 역사영화를 매개로 하여 역사비평 작업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살펴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비평을 통해 우리는 현재 마주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인 참여를 위한 계기와 자극을 받을수 있습니다. 이처럼 저는 영화를 통해 역사적인 지식을 통하여 영화를 분석해보는 방식으로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이 가진 역사와 영화의 유기적인 연결을 분석해 나가면서 영화비평을 진행해보려고 합니다.
Ⅱ. 본론
영화 ‘킹덤 오브 헤븐’
1) 영화 선정 이유
저는 수업을 들으면서 십자군전쟁이라는 주제에 흥미를 느꼈고 이와 관련된 영화들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은 12세기 말의 제 2차 십자군을 전후로 예루살렘 왕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리들리 스콧의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평화와 공존을 주장하며, 영화의 배경이 되고 있는 예루살렘의 이슬람과 기독교의 공생과 공존에 대해서 말하고 이 외에도 여러 가지 현실과 연계되는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당시 그곳은 지중해 무역의 핵심지역이었으며, 지정학적인 요충지였던 만큼 수많은 국적과 인종,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거쳐갔습니다. 새로운 땅을 찾아온 자들, 순례자들, 십자군들 그 종류도 매우 다양했습니다. 이는 현재 우리 사회의 다문화적 상황,갈등들과 그 맥락을 함께 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감독은 글래디에이터를 통해서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아 그 명성을 입증한적이 있었고, 이러한 감독의 명성이 영화를 선정한 이유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엄청난 분량을 편집했던 극장판은 생각보다 많은 혹평을 받았지만 감독판이 나오며 평가가 완전히 뒤집어졌다는 평가가 있어 극장판을 선택하여 영화를 시청하였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수많은 역사적인 고증과 더불어 비교를 통해 세계사와 함께 영화를 통해 좀 더 시대상을 알 수 있었으며 아직까지도 종교적인 이유로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 현재의 역사와도 직결되고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것 같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이유들이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되었습니다.
2) 영화와 종교적 공존의 십자군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을 통해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감독이 각자의 종교적 견해와 이로 인한 충돌과 공생을 어떤방식으로 풀어나갈것인가 였습니다. 이 영화는 예루살렘의 시각에 관한 것으로 아무래도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충돌을 다루고 있어 종교적인 시각을 주로 가질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어떠한 쪽의 종교적인 시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십자군 전쟁에 관해서는 수업에서 얻은 지식들이 있었지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서는 조금더 조사가 필요했었습니다. 무엇보다 십자군 전쟁이 신이 그리하라고 했다는 교황의 주장에 의하여 촉발된 전쟁이라고 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1차 십자군 전쟁은 수많은 기독교인이 예루살렘을 탈환하며 성내에 많은 이슬람교도들은 노인과 어린이, 여자 할 것없이 모두 죽었습니다. 또한 마지막 십자군 전쟁까지도 순수한 종교적인 목적이 아니라 재산과 영토, 부를 위하여 여러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이유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후 세부적인 내용은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과 함께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1) 영화 내용과 분석
십자군 100년 동안의 과정에 대해서 짧은 자막을 통해 소개된 이후 1184년 프랑스라는 자막과 같이 영화가 막이 오릅니다. 눈발이 휘날리고 있는 겨울 날씨는 이곳이 프랑스의 플랑드르, 노르망디 같은 북부지역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아내가 자살을 하여 실의에 빠져있는 젊은 대장장이인 발리앙(Balian)은 자신이 가진 재산을 가로챌 궁리만 하는 마을의 말단 사제인 동생을 우연치 않게 죽이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때 중요히 봐야할것이 빌리앙의 아내는 자살을 했고, ‘자살을 했으니 분명 지옥에 가있겠지”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또 주인공 빌리앙의 “예루살렘에 가면 구원받나요 제 아내의 죄도 씻겨집니까?” 라는 대사에서 당시 사람들은 자살을 통해 신이 주신 목숨을 스스로 버릴경우 지옥에 간다는 종교적인 사상이 일상속에 팽배했다는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십자군전쟁을가면 성지순례에 참가하여 면벌부를 받고 이로인해 내세를 보장한다는 명목하에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였던것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주인공 빌리앙은 이렇게 자살하여 아내가 지옥에 가는것을 막기 위한것과 동생을 살인한것에 대한 죄를 씻겠다는것이 강한 동기가되어서 성지로 향했을 정도로, 그당시 내세에 대한 생각이 아주 뿌리깊게 박혀있다는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 마을엔 십자군 기사들이 들리게 되었고 그 수장이 바로 발리앙의 아버지인 고드프루아(Godefroi)였습니다. 그는 고향 땅에 자신을 죽이고 예루살렘에 위치한 영지를 상속받으려 했던 형의 아들 군대와 충돌로 깊은 상처가 있었고, 자신의 서자였던 발리앙에게 처음으로 얼굴을 비추며 아버지라는것을 밝히고 같이 ‘성지’로 되돌아가자고 설득합니다. 빌리앙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아내의 죄를 씻고, 본인의 죄도 씻기 위해 결국 아버지와 함께 성지로 떠나는 여정을 함께합니다. 하지만 성지로 돌아갈 수 있는 항구인 메시나에서 고드프루아는 전투과정에서 아들을 지키기위해 상처를 입고 죽음에 이르게됩니다. 죽기 직전 그는 발리앙에게 이슬람과의 공존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기사서임을 합니다. 이로인해 빌리앙은 뒤를 이를 새로운 이벨린의 영주로 임명됩니다.
이를 보면서 모든 유럽인들의 다양한 견해를 알 수 있었습니다. 주인공 빌리앙이 아버지와 함께 성지로 가던중, 병사하나가 “이교도 학살은 죄가 아니오, 천국에 갈 선행이오’’ 라는 대사가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반발하지 않은것을 보아 대부분의 성지로 향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것을 알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상덕분에 성지로가는길에서 수없이 벌어졌던 크고작은 전투와 학살에도 그들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교도들을 학살하는것은 그들에게 정당한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빌리앙의 아버지는 보다 평화적인 입장이였습니다. 그는 죽기전 아들에게 기독교와 이슬람의 평화를 주장하며 예루살렘은 신분의 차별이 없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도 예수살렘이 그당시 성지로써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가진 환상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는점도 알수 있었습니다.
성지로 가는 배가 난파를 당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빌리앙은 우여곡절 끝 무슬림 현자인 이마드의 도움을 받아 번성하며 찬란했던 예루살렘 왕국에 도달하게 됩니다. 항구에서 빌리앙이 한 대화를 살펴보면, ‘신을 찬양하라 그것이 마땅하리다’라는 기도의 내용이 기독교와 이슬람이 동일하다는것에 대해 말하게 됩니다. 이는 은연중에 그 당시 사람들이 이교도들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교도의 신앙과 기독교의 신앙이 흡사한 부분이 존재하며 이교도들이 아주 야만적이고 배척해야한다는 그당시 사상이 모순적임을 은연중에 알고 있었던것 같습니다.
빌리앙은 이벨린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를 이어 새 영주로 인정을 받고 예루살렘 왕궁의 일원으로 정치 세계에 입문하게 됩니다. 왕궁에는 세력을 넓혀가던 살리딘의 위협 앞에 두 파로 분할되어 있었습니다. 이슬람과의 전쟁을 무모하다 여기면서 공존과 평화를 주장했던 프리폴리 백작인 레몽 3세와 무조건적 성전을 외치고 있는 성전기사단 수장이었던 기 드 뤼지냥과 르노 드 샤티용입니다. 그사이에서 발리앙은 새롭게 이블린 영지를 개간하고 백성들과 같이 온몸에 흙을 묻혀가며 우물을 파는등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로 인해서 공존과 화평에 관심을 가졌던 왕 보두앵 4세로부터의 신임을 얻게 되며 그의 행실에 반한 여동생인 시빌라와 사랑하는 사이가 됩니다.
그당시 예루살렘 안에서 기독교세력은 끊임없이 전쟁을 하자는 파와 평화를 택하자라는 두가지 세력간에 치열한 공방을 펼쳤고, 결국 전쟁을 하자는 쪽으로 기울여 이교도들을 학살하게 됩니다. 이에 화가난 이슬람 지도자 살라딘은 대군을 이끌고 복수를 자행합니다. 이 전쟁에서 참패했지만 주인공 빌리앙은 살아서 돌아오게됩니다. 그리고 이후 또 크나큰 평지에서 기독교와 이슬람 대군이 또다시 마주하게 됩니다. 예수살렘의 왕 보두앵4세는 살라딘에게 이일의 주범인 레오나드 드 사티옹의 큰 처벌을 약속한채 각 양군은 그대로 싸움을 벌이지 않은채 물러나게됩니다. 이를 통해 알수 있었던점은 살라딘은 당시 기독교인들이 생각했던것처럼 매우 악독하고 악마같은 인물이 아니였으며 피해를 최소화하고 싶어하고, 자국을 생각하는 어진 지도자였다는것이였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의 왕 보두앵4세 역시 주인공 빌리앙에게 순례자의 길을 지켜달라는 당부와 “특히 유대인과 이슬람인들을 보호해주게, 단지 유용해서가 아니라 그게 옳기 때문이야” 라는 대사를 통해 예루살렘의 통치차 보두앵4세는 공생과 화합을 중요시 했었다는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보두앵4세는 문둥병때문에 오래 살지못한채 서거했고, 그의 여동생 시빌라가 섭정을 하게됩니다. 그녀의 아들이 너무 어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아들도 결국 문둥병임이 밝혀져서, 결국은 시빌라의 남편에게 황제자리를 넘기게 됩니다. 새롭게 황제가 된 시빌라의 남편이자 성전기사단 수장이였던 뤼지냥은 보드앵4세와는 달리 평화적인 방법을 추구하지 않았고 살라딘의 누이를 무참히 살해합니다. 이에 대해 항의하러온 사자들 역시 목을 베어서 돌려보냅니다. 이로인해 전쟁의 서막이 열리게됩니다. 황제 뤼지냥은 이슬람을 향해 십자군을 이끌고 나섭니다. 이때 주인공 빌리앙이 이슬람으로 떠나는 십자군병사에게 왜 이전쟁에 참여하냐고 물으니 그 병사는 “ 백년전에 빼앗긴것을 찾으러 올것이오, 그것은 내 소명입니다” 라고 답합니다. 가면 죽을것이라는 빌리앙의 말에도 “ 누구든 다 죽소” 라는 답을 줍니다. 이로인해서 그당시 사람들의 사상속에 기독교적 종교의식이 매우 강했으며, 원래 우리의것을 빼앗겼다 라는 의식이 매우 강했다는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누구든 다 죽는다는 말을 통해 그 당시 사람들이 내세를 굳건히 믿었고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면 구원받을것이라는 믿음이 수많은 사람들을 전쟁속으로 이끌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쟁에 신물을 느끼고 도중 떠난이들도 존재했습니다. 떠난이들중 하나는 떠나기전 주인공 빌리앙에게 “ 예루살렘은 내 전부였어. 모든걸 바쳤지, 허나 깨닭았네 신은 핑계였을뿐, 이 전쟁의 목적은 영토와 재물이였어 부끄러워” 라는 대사를 남깁니다. 이것은 영화속에서 십자군 전쟁이 순수히 종교적인 목적뿐아니라 경제적인이유도 내포되어있다는것을 의미하는 중요한 대사라고 생각합니다.이당시 농민들은 기회의 땅이라고 생각하여 기대를 가졌고, 기사들과 영주들 역시 토지를 획득하기 위해 십자군 전쟁에 참전했던 부분을 알수있는 대목이였습니다
결국 이슬람으로 향한 황제는 패하고, 이슬람군은 예루살렘으로 진격합니다. 주인공 빌리앙은 성을 지키기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결국 패하게 됩니다. 본격적으로 성을 지키기위한 전투를 벌이기 직전 빌리앙은 성안의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발언을 합니다. “ 십자군이 이 성을 빼았았을때, 지금 몰려오는 적군도 우리도 모두 태어나기 전이였습니다. 저들과 우리는 앞세대가 저지른일로 서로 싸우는것이다. 예루살렘엔 이슬람사원이 그위에 세워졌다. 뭐가 더 신성한가 통곡의 벽? 이슬람사원?예수의 무덤? 우열은 없다 모두다 소중해. 우리가 수호해야 할것은 이 돌벽이 아니라 이안에 사는 백성들이다! ” 라는 말로 주인공은 종교적인 이유로 예루살렘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국민들 백성의 안전과 수호를 위해 이 전쟁이 임했음을 밝힙니다. 또한 당시 귀족이나 신분이 높은사람만 기사가 될수있다는 편견을 깨고, 사람들에게 기사작위를 내리며 전쟁에 사람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임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당시 신분제가 공고했던것에 비추어보면 이는 매우 혁신적인 것이였습니다. 빌리앙은 아버지가 당부했던것과 사상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그 어느 종교적이거나 경제적인, 또는 정치적인 이유가 아닌 그저 양심과, 자국민의 보호를 위합니다. 빌리앙이 과거 시빌라와 문둥병으로 보두앵4세가 죽기전 황제자리를 제의했을때 거절했던것을 보면 그는 정치적인 목적이나 영지를 넓히고 싶어서 이 전쟁에 참여한것이 아니라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십자군 전쟁에서 본인의 양심을 지키고자 했하고 지키기위해 십자군에 참여했던 영주들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성은 살라딘에게 넘어갔고, 살라딘은 성안의 모든 사람들을 무사히 기독교권으로 넘겨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살라딘도 이 전쟁이 길어질수록 양측다 사상자만 많아지고 좋을것이 없다는것을 알았기 때문에 협상을 제의했습니다. 협상을 마치고 빌리앙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한 운명공동체가 된 예루살렘 공성전 경험과 살라딘의 관대함을 통해 발리앙은 삶의 태도를 다시 그리게 됩니다. 그는 대체 무엇이길래 이렇게 많은 생명이 죽음을 위해 싸웠는지 살라딘에게 예루살렘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살라딘은 “ 아무것도 아냐, 모든것이기도 하고” 라는 대답을 합니다. 살라딘은 ‘All’이 아니라 ‘Everything’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였듯이 영화 속의 대사를 통해서 관객들은 예루살렘이라는 존재를 통하여 사실은 내세우고 있는 유일신교의 독단과 대의가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며 , 오로지 거주하고 있는 여러 다양한 사람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 부분이기도 합니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은 프랑스에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프랑스로 돌아오는 주인공의 여정을 통하여 성장해가는 전형적 교양소설의 줄거리를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험난한 여정으로 주인공인 발리앙은 새로운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 깨닫습니다. 영화 초반 아내의 자살로 인해 세상을 향한 비관과 염세에 빠졌던 빌리앙은 넓은 세상을 인식하면서 세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다양한 사람들 간의 공존 가능성을 확신하고 열린 자아를 가지게 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 성장을 통해 발리앙은 본래 원했던 종교적인 깨달음과는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를 역사적인 사실을 덧붙여서 살펴보면
애초에 발리앙이 예루살렘에 갔던 이유가 아내의 자살과 동생을 살인했다는 죄책감으로 인한 종교적인 의미의 구원을 찾고자 함이었음은 앞서 설명하였습니다. 하지만 골고다 언덕 위에서 그는 어떤 계시도 받지 못했고 도리어 새로운 삶을 가져다준 것은 영지 이벨린에서 겪은 삶이었습니다. 위계를 갖추지 않고 기사와 성직자, 농민이 모두 합심해 황무지를 개간하는 노동을 통하여 내세의 구원보다 현실에서의 삶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을 깨닫게 된것입니다. 이는 후반부 전쟁에서 전쟁의 이유를 그어떤 이유도 아닌 백성들을 위해서 라고 선포한 이유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도착한 예루살렘의 왕궁은 그가 영지에서 느낀 행복과는 전혀 정반대였었습니다. 배제와 분열, 대립의 도가니에 빠져 십자군 제후국들을 팽창하고 압박하는 살라딘 세력 앞에 모든 이교도를 마주하는 극단적 항전만을 앞세웠던 주전파들과 평화와 공존을 통하여 십자군 제후국들을 유지하려 했던 화평파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예루살렘의 통치자 보드앵 4세는 평화를 원하는 화평파를 지지했지만 그 과정에 주전파들은 살라딘의 여동생을 살해하여 변수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주전파가 본래 갖고 있던 폭력성으로 1187년 하틴 전투에서 파국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는 주인공 빌리앙이 영화 후반부에서 성을 지키기위해 고문분투하던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후 시빌라와 프랑스로 돌아온 발리앙은 영화의 맨처음 빌리앙이 대장장이일을 하던 곳에서 또다시 십자군원정대를 마주치게 됩니다. 그들은 영화의 초반부와 같이 ‘성지를 되찾으러 간다’라는 말을 꺼냅니다. 이는 십자군전쟁이 한번만의 전쟁이아니라 여러차례 걸쳐서 수없이 벌어났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영화의 제일 마지막에 “ 수천년이 지난 후에도 그곳엔 평화가 도래하지 않았다”라는 나레이션과 함께 영화는 끝이 납니다.
3) 영화와 서양 중세사
(1) 역사적 사실
① 십자군 전쟁
그렇다면 영화의 배경이 된 십자군 전쟁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럽에서는 기독교인 그리스도교가 번성함에 따라 수많은 신도가 예수가 일생을 마친 팔레스타인 지방에 위치한 예루살렘에 가기 위하여 긴 순례의 길을 떠나곤 했습니다. 이를 성지순례라고 부릅니다. 당시 예루살렘을 점령 중에 있던 이슬람교도는 기독교들이 순례를 오는 것에 대해서 방해를 하지 않았으나, 11세기 중엽 열렬한 이슬람교도였던 셀주크투르크족이 바그다드를 점령하면서 이슬람 제국의 지배자가 된 이후 기독교도들의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방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따라서 비잔틴 제국의 알렉시우스 1세가 교황이었던 우르반 2세에게 원조 요청을 하였으며 마침내 교황권이 가진 위세를 높이려 했던 우르반 2세가 투르크족을 공격한 다음 이교도들로부터 성지를 되찾으며 비잔틴 교회를 로마 교회로 통합시킬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였습니다. 이로인해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1095년 11월 공의회를 개최하며 성지 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제창하게 됩니다. 십자군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1096년에서 200여년 동안 총 8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앞서 잠시 언급한 1차 십자군 때는 예루살렘을 일시적으로 탄환했지만 빼앗겼으며 그 뒤로 탈환을 하지 못하고 계속 실패하였는데 이 중에서 서유럽 영국과 프랑스, 독일 군주들이 참여했던 3차 십자군이 제일 유명하게 알려져있고, 영화의 제일 후반부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빌리앙이 다시 마주친 성지에 참여하는 인물들중 영국의 왕이있음을 보면 해당 영화는 2차 십자군전쟁이며, 3차 십자군전쟁이 시작되는것을 목격하며 끝나게 됩니다.
② 서양 중세사와의 비교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은 일상생활과 역사적인 상황에 있어서 시대적인 정밀함을 보여줍니다. 먼저 영화에서 고드푸르아가 기사군으로써 고향으로 돌아와 형이 그에게 만찬을 대접하면서 ‘기사는 기사이며 수도사는 수도사이기 때문에 둘 다 될 수는 없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를 보았을 때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고드푸르아의 형이 말한 것처럼 ‘싸우는 자(bellatores)’와 ‘일하는 자(laboratores)’, ‘기도하는 자(oratores)’라고 나뉘어진 삼위계적인 구분은 10세기 말 이래 봉건사회가 정착되며 기본적인 인간의 질서라고 여겨졌습니다. 11세기에 들어 이러한 위계는 넘나들지 못하는 것으로 정착되기 시작했는데 이 관념이 약하였을 때 조직되었으며 무장한 순례자였던 십자군들은 수도원 계율을 따르는 경건한 기사로 기사와 수도사가 가지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였습니다.
고드푸르아가 사망하기 직전에 아들을 기사로 서임하면서 병원기사단 기사들에게 고해를 하는 장면을 통해 이라한 위계 위반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영화에서 고드푸르아는 모든 종교가 공존하는 새로운 공동체는 천상의 왕국이라고 언급하며 이 왕국이 가능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죽습니다. 그가 주장한 공동체라는 것은 중세 유럽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두 가지의 전통적 틀을 깨야 하는것이였습니다. 타 종교의 배타적인 태도와 더불어 당시 봉건사회에서 요구하고 있었으며 앞서 언급하였던 위계의 틀입니다.
영화 속 기 드 뤼지냥과 르노 드 샤티용이 예루살렘에서 대장장이 출신이었던 발리앙과 합석을 하고 식사를 함께 하는데 이때 이 둘은 발리앙을 보면서 위계제를 언급합니다. 프랑스에서는 테이블에 감히 앉아있을 수도 없을뿐더러 문명화된 규범이 없다고 말입니다.
영화가 주장하는 공생과 공존은 발리앙의 영주를 통해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데 이 두 가지가 감독의 의도적 표현 요소라고 생각하였으나, 실제로 당시 12~13세기 십자군 제후국들에게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흔히 십자군운동은 단순히 정복과 침략으로 국한된 것이 아니었으며 소수 십자군들이 정착하며 뿌리를 내렸으며 지속적으로 예루살렘을 기독교 세력 안에 장악해야만 한다고 하였으나 본래 살고 있었던 토착민들을 기독교도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몰아낼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일상과 생산이 가능한 다음에 정복과 전쟁도 가능했기에 초반 1096~1099년 1차 십자군 당시 그들은 아무 전망도 예상하지 않은채 잔혹하고 폭력적이었던 성과로 미래가 매우 불투명했습니다.
당시 십자군 제후국 내 토착민과 이주지배층들은 명확한 구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비록 십자군이 지배층에 속하긴 하였으나 피지배자들도 유대인, 무슬림, 동방정교도, 라틴 기독교도 등 한 종교로 결집되지 않은 상업적으로 번화한 마을도 있었고 한 종교만으로 구성된 마을도 존재했다고 전해집니다. 이곳에 거주하는 수많은 다양한 사람들은 십자군과 순례자로 인해 이주한 것은 아니었습다. 새로운 땅을 찾아온 농민도 있었으며 러시아와 아이슬란드, 지중해 교역의 발전으로 여러 나라의 출신지를 가진 다양한 이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처음 1차 십자군이 이 지역에 도착하고 비기독교도와 기독교도라는 이분법적 구분은 지역의 통치에 있어서 실질적으로 적용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도리어 이들이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였으며 현실에 적응하고 이들과 공생을 하면서 왕국을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이를 기초로 하여 지중해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문화권을 가진 이들이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지역에 집결하여 공생과 공존이 될 것 같이 보였으나 결국 융합으로 나아가지는 못했습니다. 현실에서는 사회적 위계와 종교문화적인 배타성이 강력히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점들은 어찌보면 200년 동안에 이어졌던 십자군 제후국들이 거쳐온 역사들은 프랑스인을 필두로 하는 서유럽인의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지역에 불법으로 이주한 역사라고 바라볼 수도 있을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이 문제는 현재까지도 통합과 공존의 문제를 제기하는데 있어 중요한 주제로 대두되기 때문입니다.
③ 영화 속 허구의 편차 비교
이와 더불어 역사적인 사실과 함께 영화 속의 허구 편차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실제 예루살렘을 방어했었던 발리앙의 이야기로 영화는 이어져갑니다. 역사 속 존재했었던 Balian d’Ibelin은 프랑크인의 후손이었지만 프랑스의 태생은 아니었으며 정당하게 이벨린 영주권을 계승했던 십자군 제후국의 귀족이었고 영화에 등장한 프리폴리 백작과 2~3살의 나이 차이만 있었다고 합니다. 큰 형이 일찍 죽었으며 다른 영지를 받았던 둘째 형이 있었기에 이블랭 영주를 물려 받게 되고 예루살렘으로 향한 것입니다. 그의 나이가 40대 후반에서 50대 정도의 나이였던 것을 고려하여 그는 엄연히 유부남이었다고 전해지며 아내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마누엘 1세의 조카이며 시발라의 의붓어머니였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라 나왔던 고드프루아는 가상의 인물로써 1차 십자군에 참전했던 영웅인 Godefroi de Bouillon을 연상시키기는 하였으나 영화 속에서 감독은 주인공을 예루살렘으로 이끄는 촉매제의 역할으로 활용하였습니다. 또 발리앙과 시빌라는 영화에서 사랑하는 연인으로 묘사되었지만 실제로는 정적이었다고 합니다. 영화 속에서 시빌라가 아들이 죽고 난 뒤 예루살렘의 왕위를 기 드 뤼지냥에게 주었다는 장면을 보았을 때 실제 시빌라는 그를 엄청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실제 발리앙이 영화에서 성지로 향하는 3차 십자군을 그냥 보낸것과는 다르게 리처드 1세가 주도했던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여 공도 세웠으며 죽기 직전까지도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이었던 기 드 뤼지냥과 대립하였다고 하는데 전사적인 스타일보다는 협상에 공헌하였다고 하니 외교관에 가까웠던 인물이었다고도 합니다. 이로써 영화속 빌리앙이 제3차 십자군과 마주쳤다는 것도 허구에 속하는 부분입니다. 당시 잉글랜드군은 제3차 십자군으로 모집되어 프랑스 내륙을 가로질렀다기보다는 배를 타고 이베리아 반도를 돌아서 시칠리아와 제노바인 지중해 도시들의 메시나를 거쳐 이동했다고 합니다. 또한 예루살렘 왕궁에서의 파벌 갈등은 많은 논란을 일으킨 장면이었습니다. 실제 대립했던 두 파벌을 묘사하긴 하였으나, 열린 마음을 가진 화평파이자 악랄하고 편협한 주전파로 이분법적으로 이해하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복잡하고도 급박하게 돌아갔던 지역의 정세를 바탕으로 평화와 공존을 바라는 이상이나, 배타적이면서 잔혹함이라는 이분법적인 대립은 없었다고 합니다. 감독은 현대적 가치관으로 이런 충돌을 바라보고 꽤 극적인 표현을 위해 이분법적으로 표현한것 같았습니다.
물론 십자군 제후국 내부에서 파벌들 간의 정치투쟁이 있었다고는 하나 이슬람 세계의 내부에도 역시나 수많은 세력이 각축전을 벌였습니다. 실제 트리폴리 백작이었던 레몽 3세가 연합하고자 했던 무슬림들이 살라딘의 위협으로 인해 압박을 느꼈던 시리아에 거주하던 또 다른 이슬람 세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것보다도 당시의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지역은 영화에서 그렸던 종교에 의한 흑백논리보다는 지중해 무역의 핵심지였으며 지정학적인 요충지로써 여러 세력이 복잡하게 정치적으로 충돌했던 지역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이슬람 세계에서 볼 수 있는 타 종교를 믿는 프랑크인의 제후국이 존재했던 것뿐 기독교와 이슬람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도가 당시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영화의 후반부 예루살렘의 공성전이 벌어졌던 시기, 실제 발리앙이 기사서임을 했던 이들은 60여 명에 불과했다고 전해지며 이 지역의 토박이 기독교 신자들과 유럽인들 간의 불화로 인해 항복이 이뤄졌다고 합니다. 영화 속 살라딘이 보여주었던 관대함은 발리앙이 예루살렘 백성들을 모두 죽이고 나서 건물을 무너뜨린다는 협박에 따른 것이었으며 당시 기독교인을 해방한다는 것은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시빌라와 발리앙은 몸값을 지불을 못하게 되면 노예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 뻔한 사실이었습니다. 이에 따라서 시빌라와 발리앙은 이 같은 상황에 제3차 십자군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였던 것입니다.
4) 감상 비평
역사영화는 역사 속에서 과거의 인물들에게 펼쳐진 일 혹은 역사 주체들의 행위와 의사결정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 영화를 말합니다. 그렇기에 관객들에게 감정적 반응까지도 유도하여 과거 역사 주체에 따른 공감적인 이해를 증진시킵니다. 이 같은 감정적이고도 직접적인 반응은 긍정적 측면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부정적 측면도 함께 불러올 수 있습니다. 즉, 영화란 문자 사료가 전하고 있지 못하는 역사가 가진 진실을 담아낼 수 있단 장점이 있지만, 잘못된 메시지 선정과 영화적인 표현양식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성 또는 상업성과 같은 위험을 함께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감정이입과 공감을 활용해 과거 존재한 사람들이 살아간 삶을 총제적인 입장에서 이해하고자 할 때 메시지와 표현이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시각을 담고 있는가를 의식적으로 되짚어보는 자세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말해서 영화가 주는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제 나름대로의 대안적인 해석을 생각해보고, 이러한 주체적인 생각을 뒷받침 가능한 자료를 찾는 행동도 동반되어야 합니다.
역사를 소재로 하고 있는 영화를 보면, 때론 역사적인 사실을 재구성할 때도 있으며 감독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과거 소재만을 삼고 재창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이영화에서 공생과 공존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고 느꼈고, 리들리 스콧 감독이 이렇게 공생과 공존의 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발리앙이라는 인물의 생애와 함께 십자군의 내부 파벌 문제와 더불어 앞서서 살펴보았듯 예루살렘에서의 공성전의 몇가지 사실을 변형시키고 ,십자군 전쟁을 통한 그들의 시각에서의 이분법적인 논리를 공생과 공존 대 배타성이라는 대결성 문제로 다루어 의도적으로 이끌어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주제는 특히나 현재 21세기 서남아시아를 둘러싸고 있는 심각한 국제 정세를 맞물린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앞서 언급하였던 영화 속의 허구와 맞물려 편차를 비교하였을 때 어찌보면 이를 역사 왜곡이라고 볼 수도 있을것입니다. 그렇다면 감독은 왜 굳이 이러한 비판을 무릅 쓰고 허구를 넣어 공생과 공존을 주장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점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종교문명권 사이의 충돌을 단순 논리로써 해석하는 것을 더이상 해서는 안되며 그만두자는 것을 말하고자 한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종교의 충돌은 어떤 종류의 종교, 국가, 민족이어도 적대적인 배타성이 가진 만용으로부터 벗어나, 사회 안에서의 위계적인 편협함을 멀리하고 공생과 공존이라는 평화적 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영화속 고드푸르아가 말한 ‘모든 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새로운 공동체는 천상의 왕국’이라고 한 것과 감독의 생각이 일맥상통한다고 보았습니다.
Ⅲ. 결론
앞서 영화 ‘킹덤 오브 헤븐’를 선택한 개인적인 이유와 더불어 전체적인 줄거리를 돌아보면서 영화의 배경이자 맞물려 있는 시대적 배경인 십자군 전쟁과 서양 중세사와의 비교를 통해 영화 속 허구의 편차까지 비교해보았습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의도적인 이분법적 전략은 적대감을 부추길 수 있다는 역사학자들의 우려가 있었던 만큼 십자군의 무자비한 학살이 있었다고 묘사했던 반면 살라딘은 너무나 관대하게 그려진것은 사실이였고, 동감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이것은 도리어 이슬람 근본주의에 기름을 부어버리고 이를 정당화시켜줄수도 있을것 같다는 걱정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이러한 십자군의 잘못된 행동을 떠나 이슬람을 한 쪽으로 몰았다는 점이 불편하게 생각되긴 하였지만 십자군의 만행도 사실이였고, 감독의 의도를 표현해주기에는 이 방법이 십자군전쟁의 만행을 보다 극적이고 최대한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였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앙드레 바쟁이 주장한 리얼리즘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리얼리즘이란 사진의 존재론을 바탕으로 하여, 사진이 현실을 특정한 방식으로 포착하며 심지어 왜곡도 존재하지만 이것을 통해 우리는 현실을 바라볼수 있다는것입니다 ) 이 영화는 픽션적 경향에 좀 더 가깝다고 보는 리들리 스콧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서 공생과 공존의 역사를 감독만의 시각에서 효과적으로 풀어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역사영화를 바라봄에 있어서 순수 역사학과 영화라는 장르의 구분을 혼동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영화는 극적인 구성으로 인해 사실과의 차이를 감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세부적인 역사적 사실과 함께 비교분석하면서 역사적사실이 맞는지 하나하나 비교해보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가, 어떠한 역사적 의미를 환기시키고자 하였는가에 관한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부분에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은 굉장히 역사적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참조..... ( )